한국에서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면 학업과 취업에 유리하다. 시절에 따라 쓸모가 많은 외국어와 아닌 외국어가 바뀌기도 하지만, 대체로 외국어 구사력은 능력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를 모국어로 한다면 유창한 다중언어자가 되기란 쉽지 않다. 왜 그럴까?
첫번째 이유는 언어 간의 거리(linguistic distance)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로 다른 언어가 철자법이나 어휘의 뿌리 등에서 비슷하다면, ‘언어 간의 거리가 가깝다’고 한다. 외국어를 배워 본 한국인이라면, 한국어와 외국어 사이의 거리가 매우 멀 것이라 예상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두 언어 사이의 유사성 점수를 제공하는 eLinguistics에 따르면, 영어와 독일어와의 거리는 30.8이다(0-100의 값에서 0에 가까울수록 두 언어 간의 거리는 가깝다). 뿌리가 같은 언어이니 당연한 결과다. 지난 컬럼에서 이야기했듯이, 영어가 능숙해진 아이에게 독일어의 시작이 조금 가벼웠던 것은 두 언어 간의 이런 유사성 때문이리라. 노르웨이어와 스웨덴어의 거리는 13.9이다. 며칠동안 노르웨이어로 된 메뉴에 익숙해진 한국 아이가 스웨덴 식당의 메뉴를 한 눈에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노르딕의 각 국가(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에서 온 세 사람이 서로 자신의 모국어로 말하면서 대화가 가능할 법도 하다.
그렇다면 한국어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한국어와 영어의 거리는 90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수치인지는 ‘It’s Greek to me(그건 나한테 그리스 말이나 마찬가지야)’라는 영어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다. 세익스피어 시절부터 쓰인 이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라는 뜻이다. 이렇게 영어 원어민들이 통상 어려워하는 언어인 그리스어와 영어는 69.9의 거리가 있다. 그렇게 어렵다는 그리스어와의 거리조차 한국어보다 가깝다. 영어 외의 언어들도 한국어와 가까운 경우는 드물다. 독일어의 거리는 95.5, 노르웨이어와는 97.2, 스웨덴어와는 97.2이다. 그나마 좀 가까울 듯한 일본어와는 88이다. 사실, 이 거리값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긴 하다. 한국어가 비교 대상이 될 때 p값(비교 결과가 우연이 아닐 확률)이 매우 낮아지기 때문인데, 한국어의 다른 데이터를 입력하여 다시 비교하면 다른 거리값을 얻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또한 한국어가 다른 언어와의 비교 자체가 힘들만큼 독특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동안 외국어 공부가 힘들었던 독자들은 ‘내가 능력이 없어서’라는 자책을 잠시 내려놓자. ‘이렇게 힘든 조건 속에서 공부해 온’ 자신에게 토닥토닥 격려를 해주자.
두번째 원인은 배우려는 외국어의 음성 대화(oral communication)에 노출이 적다는 데에 있다. 보통의 한국인이 보통의 환경에서 외국어를 공부할 때, 이런 노출보다는 책이나 오디오 등 학습자료를 이용한다. 자연스러운 언어 습득 환경이라면, 주변 사람들이 그 언어로 대화하는 것을 듣고 자연스럽게 억양, 리듬, 어조, 분위기, 언제 끊어서 말하는지 등을 익히게 된다. 이런 음성 정보의 체계(prosody)는 말하기와 듣기 능력 향상에 당연히 중요하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이런 음성 정보의 체계가 읽기 능력 향상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읽기 능력은 쓰기 능력 향상에 영향을 미치므로, 결국 음성 정보에 노출이 적은 환경은 외국어의 모든 영역 발달에 걸림돌이 된다.
사람들은 모국어로 소통할 때 개떡같이 말해도(쓰여져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처럼 띄어쓰기가 없어도 글쓴이의 의도를 알기 쉽다. 그런데 잘 모르는 언어로 되어있다면 이 문장이 어떤 덩어리들(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기 어렵다. 특히 단어의 위치가 의미 전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영어(예: love의 문장 상 위치가 ‘사랑’ 또는 ‘사랑하다’ 중 어느 것으로 해석되는지를 결정한다)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각 문장을 의미의 덩어리로 어떻게 나누어 이해하는지는 문법책을 통해서 어느정도 습득이 가능하지만, 음성대화에 노출이 된다면 자연스럽게 얻어진다. 한국인에게 흔한 영어공부경험인 수능 영어를 생각해보자. 단어의 뜻을 우리말로 익혀 문장을 해석할 뿐, 발음이나 억양을 배우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문장마다 끊어읽기를 따로 배워 해석해야 하고, 해석했다 하더라도 내용이 오래 기억하지 않는 이유다.
세번째 원인은 정보처리이론에서 찾을 수 있다. 언어는 ‘의미’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은 언어 정보가 입력되었을 때 이 두가지를 동시에 처리하지 못할 때가 있다. 어려운 외국어로 된 정보를 처리할 때 그렇고, 나이가 들면서 더욱 그렇다. 영화 겨울왕국(Frozen)이 한참 인기를 얻을 때, 나의 소셜네트워크 타임라인에는 친구들의 영화관람 포스팅으로 가득찼다. 불혹이 넘은 친구들이 적은 영화 제목은 우습게도 ‘눈의 왕국’, ‘겨울 여왕’, ‘북극 디즈니 영화’ 등 다양했다. 제목이 모두 다르다(즉, 언어의 ‘형식’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자연스러운 댓글을 주고받았다(즉, ‘의미’ 전달에 집중했다). 외국어 공부를 할 때 ‘의미’에만 집중하다 ‘형식(문법, 문장구조, 담화구조의 이해)’을 놓치거나, ‘형식’에 집중하고는 ‘언어’ 실력 향상이 안된다고 속상해하는 경우도 있다. 혹은 ‘의미’와 ‘형식’ 공부를 섞어서 하면서 학습 효율이 없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한국인에게 외국어학습이 어려운 이런 원인을 해결하는 방법은 교사들의 외국어 실력 향상, 원어민 교사의 수를 늘이기, 어학연수가기 등이 아니다. 21세기 한국에서 가능한 해결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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